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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윌슨과 구름상자

윌슨과 구름상자 

소립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거품 상자(bubble chamber)의 원조인 윌슨의 구름상자(cloud chamber), 혹은 안개상자(Nebelkammer)는 1930년대 이후 우주선(cosmic ray) 분야에서 원자구성입자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장치였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물리학 실험 분야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윌슨 자신은 원자물리와는 거리가 먼 기상학에서 활동했던 과학자였다. 70여년에 걸친 긴 학문 여정 속에서 윌슨은 항상 날씨와 관련된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쓰이는 구름상자가 기상학을 연구하던 윌슨에 의해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윌슨이 성장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그 어느 시대의 과학자들보다도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데 열광적이었다. 빅토리아인들에게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탐험가들은 사막, 정글, 남극과 북극의 빙산 등을 탐험했으며, 화가들은 폭풍우, 산림, 절벽, 폭포 등을 화폭에서 재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기상학과 광학 분야에서 자연 현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방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에 열중했다. 즉 그들은 푸른 하늘, 먼지, 구름, 안개, 비, 천둥, 번개 등의 기상학 현상을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런 모방 실험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형태의 윌슨의 구름상자는 1911년이 되서야 등장하게 되지만, 윌슨의 이 작업은 1890년대에 그의 기상학 분야에서 추구했던 모방 실험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 1869-1959)은 15세에 맨체스터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의대 학생으로 입학해서 1887년 18세의 나이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약 1년여 동안 철학,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다가 케임브리지에서 장학금을 얻어 입학한 뒤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었다. 1888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윌슨은 1892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자연과학 분야 졸업 시험인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마쳤다.

오웬스 칼리지 시절부터 윌슨은 방학을 이용해서 스코틀랜드 산악 지역을 탐험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답사하면서 윌슨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소위 훔볼트식의 과학 연구 방식에 심취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진기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구름에 대해서 사진을 찍곤 했다. 1927년 아서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 1892-1962)과 함께 고에너지 광양자 산란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윌슨은 당시 북부 산악 지대에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94년 9월 나는 벤 네비스(Ben Nevis) 정상에 있는 기상대에서 몇 주를 보냈다. 태양이 언덕 마루 주변의 구름 위에 비출 때 보였던 놀라운 광학 현상, 특히 태양 코로나 주변이나 언덕 마루에 드리워진 그림자 주변의 컬러 고리, 혹은 안개나 구름 위의 후광 등에 대한 관찰 등은 내 관심을 크게 자극했고, 나로 하여금 그것들을 실험실에서 흉내내도록 만들었다." 벤 네비스를 여행하는 동안 윌슨이 관찰했던 광학적, 전기적 현상은 그 뒤 윌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은 그가 이 이후 평생 동안 하게 될 과학 연구 목표가 되었다. 1959년 윌슨이 죽기 직전까지 기상 광학과 대기 전기는 그의 핵심 연구 과제였던 것이다.

물리 실험조교와 튜터를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젊은 윌슨은 케임브리지에서의 어려운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는 없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요크셔의 브래드퍼드 그래머스쿨(Bradford Grammar School)에서 몇 달간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오히려 전보다도 자유시간을 갖기가 더 어려웠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캐번디시연구소에 등록한 의학도를 위해 물리학을 가르치는 실험교수(demonstrator)로 일하면서 캐번디시연구소와 다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때 캐번디시연구소에는 톰슨(J.J. Thomson, 1856-1940)의 지도 아래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 등 우수한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고, 윌슨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이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윌슨 이전에도 몇몇 과학자들이 구름을 형성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에이트킨(John Aitken, 1839-1919)의 실험이 윌슨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이트킨은 윌슨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인으로서 벤 네비스에서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에이트킨은 구름 실험을 통해서 과포화 상태의 공기 중에서 먼지 입자가 물방울을 응결시키는 핵으로 작용한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그는 1888년 과포화 공기의 응결을 연구하기 해서 공기 중의 먼지 입자의 수를 세는 소위 먼지 상자(dust chamber)를 고안해내었는데, 에이트킨의 이 먼지 상자가 윌슨의 구름상자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기상학 현상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돌아온 윌슨은 구름의 광학적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에이트킨과 유사한 팽창 장치를 이용해서 수증기를 응결시켜 자신이 벤 네비스에서 보았던 컬러 고리 모양의 광학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95년 3월에는 먼지 없는 공기 속에서 수증기가 응결하는 최초의 실험장치를 만들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응결을 위한 팽창비(expansion rate)---여기서 팽창비는 팽창 후의 부피와 팽창 전의 부피의 상대적 비율로 정의된다--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초기 온도가 16.7 °C일 때 임계 팽창비가 1.258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보다 낮은 팽창비에서는 먼지가 없는 공기 중에서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렇게 임계 팽창비를 정확하게 측정해가는 과정에서 곧이어 대륙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광선'들도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윌슨이 구름상자를 연구하던 캐번디시연구소에서는 1884년부터 J.J. 톰슨이 소장으로 이끌면서 물질의 근본 구성을 연구하는 분석적 연구 전통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이런 분석적 연구 전통은 훔볼트적이며 형태론적인 모방 실험 전통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윌슨이 기상학적 전통에서 개발한 실험 장치는 캐번디시의 분석적인 연구 전통에 속했던 과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구름상자는 원자 세계를 연구하는 장치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훗날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훌륭하게 사용되게 될 윌슨의 구름상자는 물질의 구성에 대해 연구하는 캐번디시연구소의 분석적 연구 전통과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시키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방 실험의 전통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윌슨은 1888년부터 1892년까지 케임브리지 학생으로서, 그리고 1895년부터는 케번디시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물질의 구조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연구 스타일을 배웠다. 더구나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온과 같은 기본적인 전하량을 가정해서 물질을 연구하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이리하여 케임브리지의 이온 물리학 전통은 자연스럽게 윌슨의 구름상자 발명과 궤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1896년 새해 전세계 과학자들은 독일의 뢴트겐(Wilhelm Konrad Rntgen, 1845-1923)이 발견한 새로운 종류의 광선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뢴트겐이 찍은 반지를 낀 자기 처의 사진은 논문 발표와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소위 '광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뢴트겐이 찍은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 회의에서 회람시켰고, 이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안되어 1896년 3월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발견했다. 뢴트겐의 새로운 발견은 캐번디시연구소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음극선 연구에 다시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인 1897년 4월 30일 J. J. 톰슨은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음의 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 즉 전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게 된다.

뢴트겐의 새로운 광선 발견 소식에 접합 윌슨은 이 새로운 광선을 자신이 만든 구름상자에 쏘아보기를 바랬다. 윌슨은 1896년 톰슨의 조수인 에버릿(Ebenneezer Everett)에게 X-선 관을 빌려 이것을 자신의 구름상자에 투사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X-선에 의해 형성된 핵 주위에 응결이 생기는 팽창비가 1.25임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1896년 3월에 발견된 우라늄선도 X-선과 마찬가지로 팽창비 1.25에서 응결을 증가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우라늄선과 X-선에서 모두 같은 팽창비에서 짙은 안개가 생기는 것을 확인한 윌슨은 응결핵이 이 새로운 광선에 의해 생기는 이온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98년까지의 실험에서 윌슨은 구름상자에서 나타나는 응결 현상을 몇몇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우선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 팽창비가 1.25 이하일 때는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 그 뒤 1.25에서 1.31 사이에는 분명한 형태의 빗방울이 생겨나다가 팽창비가 1.31일 때 빗방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마지막으로 팽창비가 1.37 이상일 때는 짙은 안개만이 형성된다. 또한 이 때를 즈음해서 윌슨은 응결핵의 전하가 차이가 나면 빗방울이 생기는 팽창비가 차이가 나는 것도 발견했다. 즉 두 배의 전하량을 가진 응결핵은 팽창비가 1.25에서 빗방울이 생기게 만드는 반면, 단위의 전하량을 지닌 응결핵은 팽창비가 1.31이 되야 빗방울이 생기게 된다.

1898년 말 윌슨은 그 동안의 실험을 정리해서 {철학연보}(Philosophical Transac- tions)에 하나의 긴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윌슨은 X-선, 우라늄선, 자외선, 그리고 그 외 다른 기작에 의해 기체 속에서 응결핵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윌슨은 이런 체계적인 실험이 자신이 본래 의도했던 연구 방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즉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실험을 하는 동안 윌슨의 장치는 대기 현상을 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이온들의 성질을 연구하는 장치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훗날 윌슨의 구름상자가 원자구성입자를 연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연구 방향의 변화는 과학 발전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상학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윌슨에게는 이것은 원래 자신이 목적한 바가 아니었다. 결국 윌슨은 구름상자가 천둥과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구름상자를 포기하고 이온화를 측정하는 전기적 장치인 검전기를 자신의 새로운 실험 장치로 채택하게 된다. 이후 윌슨의 주요 관심사는 대기 전기를 연구하는 것이 되었고, 1910년 12월까지는 그는 구름상자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연구 활동했다.

실제 비가 형성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의 형성과정을 실제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윌슨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름과 같은 자연 현상을 사진으로 찍곤 했다. 1908년 윌슨은 당시에 워딩턴(A.M. Worthington)에 의해 출판된 『물튀김 연구』(A Study of Splashes)에 나오는 물방울과 물이 튀기는 모습에 대한 고속촬영 사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윌슨은 다시금 구름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해서 그것을 촬영하고 싶어했다. 즉 사진기를 이용해서 음전하 입자와 양전하 입자가 서로 결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결국 사진 기술을 이용해서 비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사하려는 윌슨의 의도로 말미암아 윌슨은 기상학에서 다시 이온 물리학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이런 연구 테마의 변화 과정에서 윌슨의 구름상자가 입자의 궤적을 촬영하는 장치로 이용되게 된 것이다.

1910년 12월 윌슨은 다시 자신의 구름상자 장치로 돌아왔다. 그는 이온화된 입자들을 이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이온화된 입자들의 궤적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구름상자가 탄생되었다. 1911년 4월 윌슨은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선, X-선 등이 지나가는 모습에 대한 희미한 사진을 발표했다. 이어 다음 해인 1912년 윌슨은 이들 입자들의 궤적에 대한 아주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알파 입자가 물질과 충돌해서 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선명한 사진은 당시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가 예측했던 알파 입자 궤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많은 과학자들에게 구름상자의 잠재적인 위력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다.

윌슨의 구름 상자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지게 된 데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과학 실험 장치를 제작, 판매해왔던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The Cambridge Scientific Instrument Company)의 역할도 컸다. 윌슨의 구름상자가 나온 바로 이듬해인 1913년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상업용 구름상자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 장치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1919년 러더퍼드는 톰슨의 후임으로 맨체스터에서 캐번디시 연구소로 옮겨왔는데, 거기에는 다케오 시미츠(Takeo Shimizu)라는 일본 학생이 있었다. 현재의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연구소에는 1920년에 찍은 당시의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학생 사진 가운데 나타나 있는 유일한 동양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다케오 시미츠이다. 러더퍼드는 다케오 시미츠에게 윌슨의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알파 입자와 질소 원자핵의 충돌을 점검해 볼 것을 권유했고, 1921년 다케오 시미츠는 빠르고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제작했다. 다케오 시미츠는 단순조화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으로 압축과 팽창을 하게 함으로써 적정 시간 내에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구름상자를 개선해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시미츠가 자동 구름상자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도록 도와주었고, 그에게 로열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타게오 시미츠는 가정 문제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 뒤 소식이 끊겨 향후의 구름상자의 개선 과정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다케오 시미츠가 일본으로 떠나 더 이상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핵반응을 실험하는 작업은 1921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패트릭 블랙킷(Patrick M.S. Blackett, 1897-1974)의 몫이 되었다. 블랙킷은 다케오 시미츠의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단순 조화 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는 윌슨의 원래 장치로 다시 복귀했다. 물론 문제는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동화된 장치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블랙킷의 새로운 자동화된 구름상자는 약 10-15초에 한번씩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1924년 그는 이 실험 장치로 질소 원자가 붕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후 블랙킷은 계속 구름상자를 개선해 나갔다. 정확한 과포화 상태에서 알파 입자를 투사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블랙킷은 아주 복잡한 행정 경로를 지닌 피스톤 운동으로 유지되는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고안해야만 했다. 1920년대의 구름상자에는 아직 전자공학적 장치가 이용되지 않았으며, 피스톤의 운동과 사진의 셔터도 복잡한 기계 장치에 의해서 조절되었다. 이외에도 블랙킷은 두 개 경사 렌즈 카메라를 이용해서 가장 최적의 촬영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막스 보른(Max Born)이 양자역학적인 충돌 이론을 제창한 이래로 양자물리학자들은 충돌 현상과 연관된 다양한 양자역학적 산란식을 유도해냈다. 하지만 당시 러더퍼드를 비롯한 중진 과학자들은 알파 입자의 산란과 같은 핵 현상에 양자역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충돌 현상과 연관된 양자역학적 논의는 막스 보른, 디랙(Paul Adrien Maurice Dirac, 1902-1984),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모트(Nevill Francis Mott, 1905-1996)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됐는데, 특히 모트는 다양한 충돌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양자역학적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1929년 보스-아인슈타인 통계에 따르는 알파 입자들 사이의 충돌 과정을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새로운 양자론적 산란과 고전적인 러더퍼드 산란 사이의 비를 계산했는데, 그 비율은 산란각이 45˚일 때 최대값이 2로 나타났다. 양자역학적 산란과 고전적 산란의 비인 이 2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기만 하면 충돌 과정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1930년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과 블랙킷은 이 문제의 비율인 2를 실험적으로 확인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충돌 과정에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함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당시 채드윅은 이 과정을 자신이 러더퍼드와 오랫동안 함께 사용해오던 섬광계수기 방법을 통해 입증했으며, 블랙킷은 자신이 1920년대를 통해 개량을 거듭해오던 구름상자에 의한 사진 촬영에 의해 이 사실을 입증했다. 채드윅과 블랙킷의 이 두 실험은 양자역학의 유효성을 분명하게 입증했다는 것 이외에 이 실험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전자 장치를 이용하지 않은 마지막 실험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우선 채드윅은 이 실험 이후 섬광계수기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1932년 새로운 중성자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1년부터 블랙킷도 자신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했다. 케임브리지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가 결합하게 되는 데에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주세페 오키알리니(Giuseppe P. S. Ochialini)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24년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와 발터 보테(Walther Bothe, 1891-1957)는 광양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위해 새로운 동시계수법에 의한 실험 장치를 고안했다. 동시계수법은 1928년 가이거와 뮐러가 개발한 더욱 민감한 계수기와 결합되면서 우주선 분야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부상되었다. 1930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브루노 로시(Bruno Rossi)는 2중 동시계수기보다 발달된 형태인 3중 동시계수기를 개발했는데, 그의 전자공학적 기법은 오키알리니에게 전수되었다. 1931년 오키알리니는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블랙킷을 도와 전자공학적인 동시계수 장치를 구름상자와 결합시켰다. 이리하여 우주선이 구름상자에 도착하면 이 신호를 전자공학적 장치가 감지해서 정확한 시간에 구름상자를 팽창시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블랙킷과 오키알리니는 이 새로운 전자공학적으로 조절되는 새로운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칼 앤더슨(Carl David Anderson, 1905-1991)이 양전자를 확인한 직후에 바로 우주선에서 양전자의 존재와 디랙의 이론의 유효성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윌슨의 구름상자는 블랙킷의 개량과정을 거쳐 오키알리니의 전자공학적 기법이 결합되면서 우주선 및 고에너지 분야의 연구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장치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블랙킷은 구름상자의 개량과 우주선 분야에서의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 구성 입자의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캐번디시 연구자들이 이 장치를 활용했다. 하지만 정작 구름상자를 개발한 윌슨 자신은 캐번디시 연구소 동료들이 갔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이 날씨에 대한 연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기상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 이외에도 지리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했다. 즉 그는 캐번디시연구소가 원자 물리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캐번디시연구소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물리연구소(Solar Physics Laboratory)로 자신의 실험 장치를 옮겼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90세에 뇌우에 관한 논문을 마지막으로 쓰기까지 기상학 연구에 몰두했다.

 

참 고 문 헌


[1] C.T.R. Wilson, "On the Condensation Nuclei produced in Gases by the Action of Rontgen Rays, Uranium Rays, Ultra-violet Light, and other Agents," Philosophical Transations 192 (1899), pp. 403-453.
[2] C.T.R. Wilson, "On a Method of making Visible the Paths of Ionising Particle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5 (1911), pp. 285-288.
[3] C.T.R. Wilson, "On an Expansion Apparatus for making Visible the Tracks of Ionising Particles in Gases and some Results obtained by its Us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7 (1912), pp.277-292.
[4] P.M.S. Blackett and G.P.S. Occhialini, "Some Photographs of the Tracks of Penetrating Radi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139 (1933), pp. 699-727.
[5] Peter Galison, Image and Logic: A Material Culture of Microphysic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97).

다음 호 제목 톰슨과 전자의 발견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