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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밀리칸과 유적실험

밀리칸과 유적실험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0년을 전후해서 물리학계에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둘러싸고 두 물리학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이후 여기에 참가했던 두 물리학자들은 과학계에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논쟁에 참가했던 두 논객 중 한 사람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다른 한 사람은 전자의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정신적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승리의 주인공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버트 밀리컨(Robert A. Millikan)이었으며,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인물이 바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자인 펠릭스 에렌하프트(Felix Ehrenhaft)였다. 

밀리컨과 에렌하프트 논쟁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우선 밀리컨의 유적실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아주 잘 알려진 실험인데 어떻게 해서 중견 실험과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이견이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물론 실제로 밀리컨의 유적실험을 해본 사람들은 밀리컨의 실험이 생각한 것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분수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가진 것으로 가정하는 소위 쿼크 가설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은 농담삼아 혹시 에렌하프트가 당시에 이 쿼크의 전하량을 측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밀리컨의 교육 과정


1868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난 밀리컨은 1886년 오버린 칼리지에 입학했다. 하지만 밀리컨 자신은 처음에 물리학에 그다지 커다란 흥미를 갖지 못했다. 2학년 말에 밀리컨이 그리스어를 잘 하는 것을 본 한 교수가 밀리컨에게 자신이 물리학 개론을 가르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밀리컨은 처음으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91년 오버린 칼리지를 졸업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예비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다. 1893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일한 물리학과 대학원생이자 장학생으로 입학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마이클 푸핀(Michael I. Pupin)에게 주로 물리학에 필요한 수학적 테크닉을 배웠다. 1894년 시카고에서 마이컬슨을 만난 밀리컨은 그곳에서 여름 동안 실험 테크닉을 배웠고, 마이컬슨이 정해준 학위 제목으로 189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1895년 5월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밀리컨은 당시 물리학계를 뒤흔들었던 뢴트겐의 X-선 발견, 앙리 베크렐의 방사선 발견 등 물리학계의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파리에서 밀리컨은 푸앵카레의 강의를 들었으며, 베를린에서는 막스 플랑크의 강의를 수강했고, 괴팅겐에서는 네른스트와 함께 연구를 했다. 1896년 마이컬슨의 초청으로 시카고 대학 물리학과 조교가 된 밀리컨은 처음에는 이곳에서 주로 물리학 커리큘럼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양한 교재와 실험 매뉴얼을 집필했다. 1907년 주로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 덕분에 부교수로 승진한 밀리컨은 1908년부터는 교육용 교재 집필보다는 순수한 기초 연구에 매진해서 마침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유적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밀리컨이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게 된 데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마이컬슨이 이룩한 기초 상수에 대한 정확한 측정(precision measurement)의 전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밀리컨은 1921년 시카고 대학에서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옮길 때까지 마이컬슨의 뒤를 이어 이곳 시카고 대학의 라이어슨 연구소(Ryerson Laboratory)를 미국 물리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의 이런 물리학 연구전통은 밀리컨의 후임인 컴프턴(Arthur H. Compton)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초기의 전자 전하량 측정 실험


밀리컨이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하기 이전에 이미 몇몇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했었다. 1903년 J. J. 톰슨의 학생이었던 H. A. 윌슨은 과거 톰슨이 사용했던 수증기를 이용한 안개상자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윌슨이 사용했던 방법은 갑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안개상자에 생성되는 구름이 중력의 영향 아래 하강하는 비율을 측정한 뒤, 이와 유사한 구름에 방향이 반대인 전장을 가해서 구름 방울의 하강 속도 비율을 비교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윌슨은 전자의 하전량으로 2.0×10-10(esu)에서 4.4×10-10에 걸치는 11개의 값을 측정해서 평균 3.1×10-10의 값을 얻었는데, 같은 해 J. J. 톰슨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해서 3.4×10-10의 값을 얻었다. 

1903년 당시 윌슨이 측정한 전하량 값은 상당히 편차가 심했고, 밀리컨은 이것이 X-선 관에 의한 이온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부터 밀리컨은 그의 학생 베거먼(Louis Begeman)과 함께 X-선 대신 라듐을 이온화 장치로 사용해서 윌슨의 방법을 개량했다. 이 방법을 이용해서 1908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으로 3.66에서 4.37에 걸친 값을 얻었는데, 그 평균은 4.06×10-10이었다. 1909년에 들어와서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자신의 실험 방법을 계속 개량해나갔다. 우선 윌슨의 실험 장치와 그 동안 그와 베거먼이 사용한 실험 장치에서는 물방울을 관찰하는 동안 물방울이 기화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추구되었다. 또한 그 동안의 실험 장치들에서는 중력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전기장을 함께 가했을 때 떨어지는 물방울의 질량이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었는데, 이 점을 보완하는 것도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할 과제였다. 밀리컨은 실험 조건을 다양화하기 위해 물 이외에 알코올을 동시에 실험에 활용해보았다. 물과 알코올 방울 하강 실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강속도, 반경, 밀도, 유체의 점성도와 관련된 스톡스 법칙의 유효성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물로 포화된 공기와 알코올로 포화된 공기 중에서 점성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었다. 또한 정전기장 내에서 단일하게 하전된 방울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실험의 정확도를 유지하는 데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1909년 가을에 물방울과 알코올 방울로 실험을 한 밀리컨은 기본 하전량의 2배에서 6배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측정했는데, 이때 그가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값은 4.65×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그 동안 다른 방법으로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측정값과 비교해보았다. 1906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 이론에서 실험치로부터 이론적으로 얻어낸 값은 4.69×10-10이었으며, 1908년 러더퍼드가 전기적 방법으로 알파입자의 하전량을 측정해서 얻은 값은 4.65×10-10이었다. 또한 1908년 섬광계수기 방법으로 레게너(Erich Regener)가 얻은 값은 4.79×10-10이었으며, 베거먼이 윌슨의 방법으로 밀리컨과 같은 연구소에서 얻은 값은 4.67×10-10이었다. 이런 일련의 값을 종합하여 밀리컨이 얻은 평균값은 4.69×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이 다른 사람들이 얻은 값과 오차의 한계 내에서 일치하는 것에 고무되어 물질의 원자론적 견해에 대해 보다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기본적인 하전량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에렌하프트의 반론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계속 개량하고 있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곧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 유무를 놓고 밀리컨과 평생 동안 논쟁을 하게 되는 펠릭스 에렌하프트였다. 에렌하프트는 밀리컨에 비해 11살 아래의 젊은 과학자였지만, 적어도 과학적 연구 경력과 명성에 있어서는 밀리컨에 비해 훨씬 앞선 인물이었다. 187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에렌하프트는 빈의 대학과 공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3년부터 빈대학에서 조교와 사강사로 지내면서 그는 펠릭스 엑스너(Felix Exner), 프리드리히 하젠외를(Friedrich Hasenhrl), 슈테판 마이어(Stefan Meyer), 에곤 폰 슈와이들러(Egon von Schweidler), 에른스트 레흐너(Ernst Lechner) 등 빈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1909년 에렌하프트는 밀리컨과 유사한 방법으로 전자의 '기본양자'를 측정해서 4.6×10-10의 값을 얻었다. 하지만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해서 이를 발표한 것을 본 에렌하프트은 1910년 4월 갑자기 자신이 전자의 하전량보다 더 작은 전하량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1910년 5월 12일 에렌하프트는 빈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전자 이하의 하전입자'(subelectron)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자연계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하전량은 1× 10-10(esu) 혹은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금 입자의 전체 하전량이 5×10-11에서 1.75×10-10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에렌하프트와 그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자의 절반, 50분의 1, 100분의 1, 심지어는 1000분의 1의 양까지 발견했다. 에렌하프트가 이렇게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반원자론적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경험비판론이라는 상대주의적 지식관을 주장했던 마흐는 죽을 때까지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에렌하프트가 그의 생애 동안 논쟁을 벌인 것은 단지 전자의 기본 하전량 문제 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 에렌하프트는 자신이 자기단극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번 학계에서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에렌하프트의 생애는 복잡한 물리 현상의 해석과 연관된 미해결의 논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2년 빈대학의 부교수가 된 에렌하프트는 1920년 정교수가 되어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 그는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미국으로 잠시 망명했고, 전쟁이 끝난 뒤 빈 대학으로 돌아와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1952년 사망했다. 

 

밀리컨의 유적 실험


에렌하프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 개선해나갔다. 이미 밀리컨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봄 사이에 물이나 알코올 이외에 기름방울에 의한 하전량 측정 실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오일로 사용되는 기름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낮기 때문에 기름 방울이 오르내리는 것을 30분에서 4시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측정할 수 있었다. 물 이외에 기름 방울을 선택한 것은 밀리컨이 기본전하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한편 밀리컨은 기름 방울의 지름이 기체 분자의 평균 행정 거리의 크기에 가까워질 경우에는 기존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던 스톡스 법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밀리컨은 기존의 스톡스의 법칙에 커닝엄의 이론을 이용해서 교정을 한 소위 스톡스-커닝엄(Stokes-Cunningham) 법칙을 채용했다. 이 새로운 법칙에서는 기체 분자의 행정거리를 방울의 반경으로 나눈 항이 1차 교정 항으로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전하의 하전량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공기의 점성도(coefficient of viscosity)를 아주 정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많은 오차 요소를 제거해나간 끝에 마침내 1913년 6월 2일 밀리컨은 4년에 걸친 그의 실험의 결과를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다. 당시에 그가 발표했던 기본하전량은 4.774 ± .009 × 10-10(esu)였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페랭(Jean Baptiste Perrin) 등이 브라운 운동을 이용해서 얻은 값, 플랑크의 열복사 이론에서 얻은 값, 레게너가 방사선 방법으로 얻은 값과 비교해서 이들의 평균값이 기름 방울 방법에 의해 얻은 값의 오차의 한계 내에 있음을 보였다. 더 나아가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이 정확하게 측정됨으로써 분자의 기체상수, 플랑크 상수, 볼츠만 상수 물리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기초 상수들도 새롭게 계산될 수 있었다. 

 

밀리컨과 광전 효과 실험


유적 실험이 마무리되는 동안 밀리컨은 그 동안 자신이 미루어 놓았던 광전 효과에 관한 실험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은 밀리컨이 이미 1906년부터 하던 실험이었는데, 당시에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도 알지 못했으며, 실험 자체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2년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을 알게된 밀리컨은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당시까지 입사선의 진동수와 광전자의 속도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1914년 독일의 람사우어(Carl Ramsauer)가 측정한 실험에 의하면 입자 진동수에 따르는 광전자의 최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고, 속도 분포도 입사광의 파장과는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밀리컨은 우선 고압 수정-수은 램프를 이용해서 자외선을 만들고 그것을 나트륨과 리튬과 같은 알칼리 금속에 가했다. 또한 그는 입사된 복사선의 영역에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산화구리망으로 된 패러데이 상자(Faraday cage)를 채용하고 금속을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서 광전류의 세기를 높여나갔다. 1915년까지의 주의 깊은 실험을 통해서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해낼 수 있었다. 그는 입사광의 진동수와 차단 퍼텐셜 사이에 선형적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그래프를 통해 보여주었으며, 이 선의 기울기가 플랑크 상수를 전자의 하전량과 나눈 값이라는 것도 확인함으로써 플랑크 상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나타내는 다양한 모습을 다각도로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자체는 믿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빛의 파동론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배제한 채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방정식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밀리컨과 칼텍


1917년 미국과 독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밀리컨은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의 부의장 겸 연구책임자를 맡아 미국에서 국방 과학에 대한 연구를 지휘했다. 국립연구회의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조지 헤일(George E. Hale)이 국방연구를 도울 목적으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든 국립과학아카데미 소속의 민간단체였는데, 전쟁 중 밀리컨은 음파를 사용해서 잠수함의 위치를 발견하는 잠수함 탐지기 개발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헤일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즉 칼텍으로 자리를 옮겨 짧은 시간 내에 이 대학을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소수정예의 공과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칼텍은 1917년 이름이 바뀌기까지 '스룹공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한해에 약 10여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건물 한 채 뿐인 작은 학교였다. 천체물리학자 조지 헤일은 이 허름한 지방 대학에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적극 유치해 이 학교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변화시켰다. 카네기재단의 기금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천문대였던 윌슨산 천문대를 설립한 바 있었던 헤일은 윌슨산 천문대와 협동적 연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룹공과대학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 물리학, 화학, 천문학 사이의 협동적 연구를 추구한 헤일은 MIT에 있던 노이즈와 시카고에 있던 로버트 밀리컨을 캘리포니아로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노이즈의 경우는 MIT 대학 내에서 불화가 있어 칼텍으로 왔기 때문에 헤일은 노이즈를 비교적 쉽게 초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적 실험과 광전효과 실험으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밀리컨을 칼텍으로 초빙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헤일은 밀리컨을 데려오기 위해 미국 교수 임용사상 보기 드문 아주 방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밀리컨에게 대학 운영위원회(Executive Council)의 의장직과 노먼브리지물리학연구소(Norman Bridge Laboratory of Physics) 소장직을 맡겼으며, 당시 다른 대학 최고급 교수의 두배에 해당하는 초특급 봉급도 주었다. 1921년 가을 밀리컨은 마침내 시카고 대학에서 칼텍으로 옮겨오게 된다. 칼텍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밀리컨은 1923년 전자의 기본 하전량 및 광전 효과에 대한 실험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새롭게 출발한 칼텍에 커다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자신도 미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밀리컨은 직책상 대학운영위원회 의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우선 그는 대학의 재정 확충과 기금 확보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남캘리포니아 유지 약 100명으로 구성되는 '칼텍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 후원회의 역할은 1년에 약 1천 달러씩 10년 동안 후원해주면 대학에서는 그 보상으로 대학의 강연을 포함한 각종 행사들에 그 사람들을 초청해 주는 것이었다. 이 후원회는 불과 1년만에 정원을 다 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이 낸 매년 10만 달러의 기금은 약 2백만 달러의 증여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칼텍으로 옮겨온 뒤 밀리컨은 우수한 박사과정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을 자기 주변에 모아 빠른 시일 내에 칼텍을 미국 내의 대표적인 연구중심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저온에서 금속 전자의 방출에 대한 연구를 했던 아이링(Carl F. Eyring)과 낮은 원자번호 원소들의 자외선 스펙트럼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해서 곧이어 등장하는 전자 스핀 개념으로 설명되는 다양한 실험적 정보를 얻어냈던 바원(Ira S. Bowen) 등은 모두 대학원생 시절에 밀리컨과 함께 연구를 했던 과학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칼텍에서 '우주선'(cosmic ray)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우선 '우주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밀리컨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1925년 여름 밀리컨은 캘리포니아의 산중에 있는 뮤어호수(Muir Lake)와 애로우헤드호수(Lake Arrowhead)에서 깊이에 따른 이온화의 변화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이온화상자를 이용해 이 두 호수에서의 이온화강도를 측정한 밀리컨은 두 호수에서 깊이에 상관없이 이온화강도가 거의 같음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그는 대기를 이온화시키는 복사선이 지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오는 '우주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계속된 실험에서 밀리컨은 '우주선'이 감마선보다도 더욱 강력한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고 믿게 된 밀리컨은 우주선인 광자가 지구와 충돌해서 수소, 헬륨, 산소, 규소 등의 원소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원자들이 빛에서 생성되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 과학계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1932년 아서 컴프턴이 우주선이 하전입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우주선의 위도효과(lattitude effect)를 발견함으로써 마침내 반박되었다. 

컴프턴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위도효과를 확인했지만, 밀리컨 자신은 이 위도효과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역시 1920년대 말부터 1932년까지 위도효과를 확인하려는 실험을 했었지만, 그 자신은 이런 효과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컨이 위도효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밀리컨 자신이 우주선이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뿐만이 아니라 밀리컨이 있었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가 위치상 위도효과를 발견하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 이후에는 다시 엄청난 성공의 소식도 들려왔다. 밀리컨 자신은 위도효과에 관련한 우주선 연구에서 실패했지만, 칼텍에서 밀리컨과 함께 연구하던 앤더슨(Carl Anderson)은 이 우주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1932년 양전자(positron)를 발견해 칼텍 출신 학생으로는 최초로 193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밀리컨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더욱 중요시하는 보수적 유형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혁명적 이론이 출현하는 것을 과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를 개선하고 물리량을 될 수 있으면 정확하게 측정하는 과정이 곧 과학 발전에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밀리컨이 지닌 이런 과학관은 그가 행한 다양한 대중 강연과 과학사 관련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밀리컨은 칼텍을 학문적 목적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전쟁 중에 이미 많은 행정적인 업무를 젊은 보직 교수들에게 인계하기 시작한 밀리컨은 1946년 대학교수직과 대학 운영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밀리컨은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와 같은 대중적인 주제로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을 계속하다가 1953년 칼텍이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1] H. A. Wilson, Phil. Mag. 5, 429 (1903).
[2] R. A. Millikan, Phil. Mag. 19, 209 (1910).
[3] R. A. Millikan, Phys. Rev. 2, 109 (1913).
[4] R. A. Millikan, Phys. Rev. 7, 18 (1916).
[5] R. A. Millikan, Phys. Rev. 7, 355 (1916).
[6] Gerald Holton, HSPS 9, 161 (1978).
[7] Allen D. Franklin, HSPS 11, 185 (1980).
[8] Robert H. Kargon, The Rise of Robert Millikan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1982).

다음 호 제목 아인슈타인과 일반상대성 이론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