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리정보 > 물리학의 선구자 >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19세기말 뢴트겐에 의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이 발견되고 뒤이어 베크렐에 의해 원자핵에서 나오는 자연 방사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핵과학은 20세기초 30년 동안 하나의 새로운 학문 분야로 자리잡았다. 핵에서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와 핵변환에 대한 연구는 원자구조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말에는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으로 우리는 핵에너지를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핵물리학 분야는 또한 전기적 계수기, 이온화상자, 섬광계수기, 구름상자 등과 같은 다양한 새로운 실험 장치가 등장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알파입자의 산란을 비롯한 여러 충돌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새로운 양자역학의 유효성이 분명하게 확인되게 되었다. 
 

자연방사선의 발견


자연 방사선은 1896년 초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 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실상 베크렐의 집안은 3대째 명문 공과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나와서 우수 연구소인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했던 명문 과학자 집안이었는데, 그들은 대대로 분광학을 비롯해서 우라늄 화합물을 포함한 여러 물질들의 형광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크렐이 자연 방사성을 발견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5월까지 계속된 연이은 발표로 베크렐은 투과성, 감광성, 이온화 성질 등 자연 방사선의 여러 성질들을 규명했지만, 그의 이러한 발견은 뢴트겐 광선과는 달리 많은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새로운 광선에 주목했던 소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폴란드에서 파리로 유학을 와서 젊은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이제 막 결혼을 한 뒤,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고 있었던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즉 마리아 스쿠오도프스카(Maria Skłodowska)였다. 퀴리 부인은 기존의 화학적 분석방법 외에 남편이 자신의 전문 연구 영역인 물성에 관한 연구 경험을 활용해서 만들어 준 검전기를 이용하는 새로운 분석방법을 사용해서 우라늄보다 강력한 방사성 물질을 찾아나갔다. 엄청난 양의 피치블렌드를 처리하는 고된 작업 끝에 마침내 1898년 퀴리 부부는 구스타브 베몽(Gustave Bmont)과 함께 비스무트와 유사한 폴로늄과, 바륨과 유사한 라듐이라고 하는 새로운 방사선 물질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퀴리 부부 연구팀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면서 방사선에 관한 연구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은 단순히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러더퍼드의 방사선 연구


방사선 분야가 주요 관심 분야로 부상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방사선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뉴질랜드 태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뒤 1898년부터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McGill)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던 영연방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였다. 

뉴질랜드의 넬슨 지방 근처에서 태어난 러더퍼드는 1887년 중등학교인 넬슨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 역사, 언어, 심지어는 축구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 뒤 그는 크리스트처치의 캔터베리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1892년 학사를, 그리고 이듬해인 1893년에는 석사를 했다. 뉴질랜드에서 러더퍼드는 독일의 과학자 헤르츠가 발견한 전자기파를 탐지하는 데 성공하는 등 실험 물리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895년 러더퍼드는 런던 국제 박람회 장학생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으로 건너 온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당대의 최고의 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J. J. 톰슨(J. J. Thomson)과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처음에는 헤르츠의 전자파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우수한 논문을 기고해서 국제적인 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95년 12월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하자 러더퍼드는 톰슨과 함께 이 광선이 하전입자를 발생시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896년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하자 러더퍼드는 곧 이 우라늄 방사선도 공기를 이온화시키는 것을 알아내었다. 1898년 맥길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된 러더퍼드는 이곳에서 핵과학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화학자 슈미트(G. C. Schmidt)와 마리 퀴리는 서로 독자적으로 우라늄 이외에 토륨도 방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러더퍼드는 이 토륨을 실험 대상으로 하고 방사성 물질이 일으키는 이온화를 측정하는 전기적 장치를 이용해 방사성에 관련된 실험을 했다. 이 전기적 실험 장치를 활용해서 러더퍼드는 1898년 방사선이 한 가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가지 성질을 지닌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후 러더퍼드는 1902년까지 방사능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이 얇은 물질막에 의해서 아주 쉽게 흡수되는 알파선, 음극선과 유사하고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베타선, 그리고 투과력이 매우 강하며 센 자장에 의해서도 휘어지지 않는 감마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구분은 퀴리부부를 비롯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알파선이 헬륨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추측은 알파선의 입자적 성격이 확인된 뒤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계속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1908년 경 러더퍼드와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가 전기적 방법과 황화아연 결정을 이용한 섬광계수법을 각각 고안해서 이 두 방법 모두에 의해서 알파입자를 정확히 셀 수 있게 되고, 분광학적 방법에 의해 알파선이 헬륨이라는 것이 판명된 뒤에야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같은 해인 1908년 러더퍼드는 원소의 분열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현대판 연금술 핵이 변환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개발된 민감한 전위계 역시 핵과학이 출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1년 베를린의 돌레잘렉(F. Dolesalek)은 대단히 민감한 상한전위계(quadrant electrometer)를 개발했다. 당시까지 사용하던 톰슨의 상한전위계는 단지 0.1 볼트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돌레잘렉은 전위계의 내부 커패시턴스를 크게 줄임으로써 전위계를 0.0001 볼트까지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민감한 전위계의 출현으로 러더퍼드와 프레드릭 소디(Frederick Soddy, 1877∼1956)는 원소의 핵변환과 관련된 현상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02년 초 러더퍼드와 프레드릭 소디는 토륨의 방사성 활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회복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토륨이 방사선을 내면서 더욱 강한 방사성을 지닌 토륨X로 변환된다고 하는 과감한 가설을 내세웠다. 즉 원소가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새로운 원소로 변환한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피에르 퀴리 팀이 이와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에르 퀴리의 강한 실증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원소 자체가 변환한다는 지극히 가설적인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물질변환이 아니라 주로 방사성 원소가 방출하는 에너지에 대한 측정에 연구를 집중하고 있었다. 방사성 원소가 변환된다는 것이 확인되고, 이에 따라 생성되는 많은 방사성 물질이 연구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고 여겼었다. 당시에는 원소를 구분하는 것이 원자량의 차이에 의해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혼란은 1913년 방사성 원소와 그의 주기율 법칙과의 관계를 연구하던 소디가 핵의 전하량은 같지만, 원자량이 서로 다른 소위 '동위원소'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뒤이어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가 X-선 분광학을 바탕으로 해서 원자번호를 원자량이 아닌 핵의 전하량에 의해서 재정의하면서 점차로 해소되었다. 

 

섬광계수기 방법의 발전


1903년 황화아연에 라듐에서 나오는 광선을 쏠 때 섬광이 나오는 현상이 발견되어 1930년대까지의 핵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실험 장치가 개발될 수 있었다. 1903년 3월 19일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는 인광을 내는 황화아연 결정판에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부딪히게 하면 섬광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다. 이 섬광 현상을 이용하여 라듐 방사선의 충돌 현상을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독일 볼펜뷔텔의 율리우스 엘스터(Julius Elster)와 한스 가이텔(Hans Geitel)은 거의 독립적으로 토륨 수산화물 주위의 대기 방사선이 황화아연 결정판에 부딪히면서 인광을 내는 것을 발견했다. 

방사선이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과학자들은 황화아연 결정판을 이용해서 알파 입자의 본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7년 러더퍼드는 캐나다에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섬광계수기를 이용한 알파 입자 산란 실험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08년 베를린 대학 물리연구소의 에리히 레게너(Erich Regener)는 섬광계수법을 이용해서 전하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했다. 이 실험은 황화아연판을 이용해서 알파 입자의 수를 세는 데 성공한 최초의 실험이었다. 1908년 2월 22일 베를린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은 러더퍼드에게 레게너의 논문에 대해서 알려주었는데,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도 가이거와 함께 이미 이와 유사한 실험에 착수해 있었다. 

섬광계수법에 의한 실험은 무척 지겨운 작업이었다. 우선 이 실험은 한 밤중에 암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또한 관찰자는 암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15분 뒤에 측정을 해야만 했으며, 섬광을 세는 것은 곧 눈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러더퍼드와 가이거도 한 번에 2분 이상 작업할 수가 없었다. 알파 입자 산란 실험과 원소의 인공핵변환 실험과 같이 러더퍼드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런 힘겨운 작업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특히 러더퍼드의 공동연구원이었던 가이거는 이런 섬광계수법에 의한 실험 관찰에서 그야말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학자였다. 

한스 가이거는 1908년 러더퍼드와 함께 섬광계수법과 아울러 전기적 측정 방법을 동시에 개발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실험 장치를 개발해서 핵물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학자였다. 1912년 독일에 건너가 제국물리기술연구소(Physikalisch- Technische Reichsanstalt)에 새로 설립된 라듐연구소 소장이 된 가이거는 이듬해인 1913년 알파 입자뿐만이 아니라 베타 입자를 잴 수 있는 '점단 계수기'(point counter)를 개발했으며, 1924년에는 보테(Walther Bothe, 1891∼1957)와 함께 베타입자와 감마선까지도 잴 수 있는 동시계수기를 발명하여 광양자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8년 가이거는 발터 뮐러(Walther Mller)와 함께 아주 민감한 계수기인 소위 가이거-뮐러 계수기를 발명함으로써 1930년대 우주선 연구의 길을 열어 놓게 된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


한편 1909년 영국의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하던 한스 가이거와 어니스트 마스던(Ernest Marsden)은 황화아연 결정판을 이용한 섬광계수법을 이용해서 금속 판막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킬 때 직각 이상의 각도로 확산 반사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들의 실험으로 곧바로 원자구조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였던 J. J. 톰슨은 이미 원자구껍질에 양전하가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고, 이곳을 음의 전하를 띤 전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원자모형을 제기했었다. 1910년 캐번디시 연구소에 있던 크라우서의(J. A. Crowther)는 원자에 베타입자를 충돌시키는 산란실험을 실시해서 톰슨의 모형을 입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더퍼드는 가이거와 마스던의 확산반사 실험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크라우서의 베타산란 실험도 비판적으로 점검했다. 이리하여 1911년 러더퍼드는 맨체스터 연구팀이 해낸 알파입자에 의한 실험의 결과를 종합하여, 원자의 중심의 아주 작은 영역에 양의 전하를 지닌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1913년 가이어와 마스던이 했던 보다 정밀한 알파입자 산란 실험에 의해서 확증되었고, 더 나아가 보어의 원자모형에서 채택되어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도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다. 결국 보어의 원자모형이 수용되는 과정은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의 수용과 한 배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러더퍼드와 인공 원소 변환


1914년 마스던은 섬광계수기로 알파입자의 운동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던 중, 대단히 빠르고 알파입자보다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소입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이것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라듐C와 같은 방사성 물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했다. 전쟁기간 중 러더퍼드는 틈틈이 마스던의 이 실험을 면밀하게 검토했는데, 1919년 그는 마스던이 관찰한 수소 입자가 방사성 물질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원소변환이 일어나 생긴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라듐C에서 나온 알파입자가 공기중의 질소와 충돌해서 산소의 동위원소가 생기고 여기서 빠른 속도의 수소가 생겼다는 것이다. 핵변환은 이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19년 톰슨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을 하면서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직을 사임하자 러더퍼드는 맨체스터에서 케임브리지로 옮겨와 톰슨의 뒤를 이어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 패트릭 블랙킷(Patrick M. S. Blackett, 1897 ∼1974) 등 우수한 젊은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캐번디시 연구소를 핵물리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원소의 인공변환 실험을 계기로 소위 '러더퍼드의 핵자 위성 모형'을 발전시켰다. 즉 원자핵 속에서는 몇몇 작은 원자핵들이 서로 위성 운동과 유사한 복잡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빠른 알파입자로 가벼운 원소의 핵에 매우 가깝게 접근시킬 때 이들 입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힘이 역제곱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것이 핵내부의 복합적인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그는 핵 내부에 전자가 양성자와 결합하여 중성을 나타낸다는 가설을 내어놓았는데, 이런 주장은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띠게 된다. 양자역학이 발전함에 따라 핵자와 알파입자와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힘의 관계가 역제곱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자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고전역학에서 벗어나는 양자역학적 효과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러더퍼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역학과 핵물리학


러더퍼드의 주장과는 달리 핵의 붕괴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양자역학의 유용성은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되기 시작했다. 1928년 러시아의 젊은 과학자 가모프(George Gamow)는 핵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핵자 내의 포텐셜 장벽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높은 에너지 장벽을 낮은 운동에너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양자투과효과로 해석함으로써 핵붕괴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로널드 거니(Ronald Gurney)와 에드워드 콘든(Edward Uhler Condon, 1902∼1974)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발표했다. 이들의 작업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핵현상을 설명하는 데 새로운 양자역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핵 붕괴를 일으키는데는 반드시 커다한 에너지의 입자만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실험물리학자들에게 인식시켜주어 핵물리학의 실험 방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26년부터 양자역학이 충돌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범위하게 이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러더퍼드는 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알파 입자 산란을 비롯해서 충돌 현상에서 양자역학의 유효성이 입증되는 데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1928년부터 케임브리지의 모트(Nevill Francis Mott, 1905∼1996)는 미국 칼텍의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의 견해에 따라 충돌현상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적용하여 알파 입자 및 전자의 산란 현상을 면밀하게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해나갔다. 1929년 모트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이용해서 계산한 양자역학적 알파 입자의 산란값과 러더퍼드가 계산한 고전적인 산란값 사이에는 45°일 때 최대값 2의 비율로 차이가 나는 것을 계산했다. 모트의 계산 결과는 곧 러더퍼드의 밑에서 연구하던 캐번디시 연구원들이었던 블랙킷과 채드윅의 실험에 의해서 1930년 마침내 확증되었다. 이때 블랙킷은 자신이 1920년대를 통해서 계속 개량을 해오던 구름 상자의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확인했으며, 채드윅은 러더퍼드와 함께 측정을 계속해오던 섬광계수기 방법에 의해 이것을 입증했다. 러더퍼드가 말년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핵물리학 분야에서의 양자역학의 유효성은 러더퍼드가 아닌 러더퍼드의 제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러더퍼드는 물리학 현상을 설명하는 데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양자역학적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이 설명이 자신이 1911년 제안했던 원자 모형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매우 복잡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러더퍼드는 핵물리학 실험을 함에 있어서도 전자공학적 발전에 힘입은 전기적 계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매우 지겹고 어렵지만 단순한 형태로 측정할 수 있는 섬광계수법을 선호했다. 복잡한 핵물리학 현상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도 러더퍼드는 항상 원자 현상에 대한 분명하고 단순한 설명을 추구했다. 이것은 1934년 엔리코 페르미가 중성자를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다양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에 성공했을 때 복잡한 이론 물리학에서 벗어나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하게 된 것을 축하한 태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러더퍼드의 학문적 연구는 크게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주로 연구했던 방사선 및 핵변환 연구, 1907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수행했던 원자물리학 연구, 그리고 1919년 이후 죽을 때까지 소장직을 유지했던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의 핵물리학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연구를 통해서 러더퍼드는 20세기 초 원자물리학과 핵물리학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오랜 동안 캐번디시 소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 뿐만이 아니라 물리학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20세기 초 영국 과학계를 대변했다. 1921년부터 러더퍼드는 런던의 왕립연구소 자연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대중들에게 다양한 강의를 하여 많은 반향을 받았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왕립학회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그 다음에는 영국 과학산업연구부(Department of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영국의 과학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에 대한 이런 공로로 그는 1914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31년에는 넬슨의 러더퍼드 남작(Baron Rutherford of Nelson)이 되어 귀족의 지위에도 올랐다. 

 

REFERENCES


[1] E. Rutherford and F. Soddy, "The Radioactivity of Thorium Compound," J. Chem. Soc. 81, 321-350 (1902); 837-860 (1902).
[2] E. Rutherford, "The Scattering of and Particles by Matter and the Structure of the Atom," Phil. Mag. 21, 669-688 (1911).
[3] H. G. J. Moseley, "The High-Frequency Spectra of the Elements," Phil. Mag. 26, 1025-1034 (1913); Phil. Mag. 27, 703-713 (1914).
[4] E. Rutherford, "Collision of Particles with Light Atoms," Phil. Mag. 37 (1919).
[5] Marjorie Malley, "The Discovery of Atomic Transmutation: Scientific Styles and Philosophies in France and Britain," ISIS 70, 213-223 (1979).
[6] John L. Heilbron, "The Scattering of and Particles and Rutherford's Atom," Arch. Hist. Exact Sci. 4, 247-307 (1968).
[7] J. L. Heilbron, The Work of H. G. J. Moseley, ISIS 57, 336-364 (1966).
[8] Gyeong Soon Im, "The Experimentation on the Alpha Particle Scattering and the Practice of Quantum Theory," Journal of the Korean History Science Society 21:1, 3-26 (1999).
[9] Roger H. Stuewer, "Rutherford's satellite model of the nucleus," HSPS 16, 321- 352 (1986). 

다음 호 제목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임경순 교수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 과학사 박사로서, 한국브리태니커 과학 담당 책임연구원, 미국 버클리 대학 박사후연구원을 역임하였으며,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 한국과학기술도서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포항공대 교양학부 과학사 교수(물리학과 및 환경공학부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gsim@postech.ac.kr)

그 동안 연재되었던 노벨상이야기를 끝내고 이번호부터 포항공대 임경순 회원이 집필하는 물리학의 선구자가 장기간 연재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레일레이와 푸른 하늘
  2. 윌슨과 구름상자
  3. 톰슨과 전자의 발견
  4. 뢴트겐과 X-선 발견
  5. 아인스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
  6. 밀리칸과 유적실험
  7. 아인슈타인과 일반 상대성 이론
  8. 러더퍼드와 핵 물리학
  9. 닐스 보어와 고전 양자론
  10. 막스 보른과 현대 물리학
  11. 막스 플랑크와 흑체 복사 이론
  12. 아인슈타인과 광양자 가설
  13. 파울리와 배타원리
  14. 하이젠베르크와 양자 역학
  15. 양자 역학의 형성과 학문적 스타일의 문제
  16. 에르빈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17. 맥스웰과 전자기학
  18. 볼츠만과 통계역학
  19. 오토 한과 핵분열의 발견
  20.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
  21. 뉴턴과 고전역학